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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진의 즐기다보니 내 세상] 5) 군중의 중심에 서다.

[전하진의 즐기다보니 내 세상] 5) 군중의 중심에 서다.

 

Story
 

정상에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 여겼던 세상은 이미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공룡이 사라지듯 우리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개미들 처럼 집단지성으로 함께 하는 초연결사회의 조직은

인류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로의 대이동이 될 것이다.

 


그런 중심에 있는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일까? 정상에 오르는 자들은 그 자리를 두고 치열한 자리다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궁극적으로 경쟁자요,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정상을 밟을 수가 없다. 무한 경쟁사회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이런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 그래서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이런 경쟁의 논리를 가르친다.

 

하지만 초연결사회에서는 정상이 아니라 중심에서 힘이 나온다. 중심에 있는 자들은 다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군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자, 그는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주목하는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못하는 자에게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을 리 만무하다. 이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자신의 삶의 의미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 어떤 이들이 관심을 갖겠는가.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공산품같은 사람들이라면

군중은 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중심이 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는 향기가 있다.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의미있는 삶의 Story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바로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공감의 크기는 바로 새로운 시대의 파워를 상징한다. 정확히 파워라기 보다는 영향력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 싶다.


 

건강한 날개짓은 나와 연결된 주변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파장은 촘촘한 연결망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이 가능하다.

과거처럼 제한된 통로의 길을 막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절절히 고개를 조아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최근들어서 조직내 성추행, 성폭력에 관한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조직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들의 횡포가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이것을 감출 수 가 없게 되면서

피라미드구조 하에서 실력과 무관하게 폭력적 권한을 행사하던 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리 보존이 어렵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제 '경쟁의 시대는 가고 공감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시장에서도, 회사에서도 아니 그 어떤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단지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에게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로지 정상에 서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성공이라는 것은 바로 저 정상에 오른 것이야 라고 가르쳤고 또 그렇게 알고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남보기에는 좋을 지 모른다. 하지만 진정 그 자리가 가지는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자라면 말 그대로 무의미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버티기도 힘든 세상이 되어간다.


 

정상에 멋진 사진을 찍었다고 치자. 그런데 헬기로 올라가 사진 만 찍고 내려왔다면 감동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땀을 흘리며 한발 한발 죽을 힘을 다해 오른 정상에서의 사진 한 컷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Story는 그런 것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부여한 삶의 의미 이것이 바로 Story다. 이제 이 Story로 차별화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최근의 정치권을 보면 정상의 권력이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공감하거나 그들의 진정성을 믿어주는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정상에 있더라도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만다. 이는 과거에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었던 초유의 사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이제 사회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왜냐하면 이제 마치 사람과 같은 촘촘한 신경망을 가진 네트워크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숨을 곳도 감출 수 도 없는 광장의 광대들처럼 우리는 아주 적나라하게 오로지 우리의 실력만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거리의 예술가들은 어느 학교 출신인지, 어느 대회에서 수상을 했는 지 등을 묻지도 알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실력을 보여주고 그 실력을 인정하는 자들로부터 자발적 후원금(?)을 받는 것으로 거래가 끝난다.

멋진 포스터도 없으며 훌륭한 무대가 마련되지도 않는다. 비싼 티켓도 발매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관객들의 자발적 후원금을 받아낸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유명한 성악가가 거리에 나가 연주를 했는 데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예술가들이 만약 기획사가 후원을 하고 멋진 무대에 서게 된다면 수 많은 관객의 박수를 받게 될 지 모른다.

큰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거리에서 연주를 하던 오로지 실력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바로 미래사회라 말할 수 있다.

 

 

제대로 하는 자들에게는 유토피아요.. 인맥과 아부 등 갖은 편법을 동원해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성공방정식이라고 생각했던 자 - 필자는 이런 자를 자리를 탐하는 자들이라 해서 시트엘리트 (Seat Elite)라고 부른다. -

이런 시트엘리트들에게는 한마디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 자신만의 역량을 쌓아가는 멋진 Story가 있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넓게 인정받고 성공의 월계관을 보다 손쉽게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석공과 조각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구분이 갈 것이다.

 

 

성당을 짓고 있는 석공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물으니, 퉁명스럽게 '보면 몰라요.. 밥 먹고 살라고 석공질 하고 있지 않소?' 라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석공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지금 하느님의 성스러운 성전을 만들고 있다오' 라고 대답했다는 것 아닌가?

 

밥 먹고 살기위해 석공질을 하는 사람과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과 똑같이 돌을 깍는 일이지만

결과는 매우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Story는 기승전결도 있고 극적인 반전 같은 것이 있듯이 삶에 있어서도 결핍과 고통 그리고 반전이 없는 삶은

어찌보면 무의미하기도 하고 재미도 없다. 그런 삶 속에 인생의 깊이가 배어나오기 쉽지 않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자신의 삶의 이야기의 소재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앞서 예로 든 석공과 조각가의 차이처럼 확연하게 벌어질 지 모른다.

 

 

내 삶도 평탄한 삶은 결코 아니었다. 단적으로 결혼생활 30년에 이사를 20번 정도 했으니 말이다.

 

고통스러운 일상도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극적인 Story가 될 수 있다. 그 변신은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마법같은 것이기도 하다.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를 하며 큰 돈을 만졌지만 그 이후 있는 집 마저 다 날리고 빚쟁이 신세가 되었던 내가 만약 그 고통을 좌절과 실패로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국회의원자리도 또한 이렇게 책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좀 더 의미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병들어 있었거나 아직도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 결핍은 직접 경험 해 보기 전에는 느끼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예수님과 부처님과 같은 옛 성인들도 이 결핍과 고통을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받아들였고

많은 이들이 이를 따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공평하게 느끼기도 하고 살맛나게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

책으로 배워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면 이 세상은 정말 재미없지 않겠는가.


 

3대로 이어지는 부자가 없다는 말도 있듯이 과하면 줄여주고 부족하면 채워주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 가 싶다.

그래서 이 결핍은 정말이지 너무과해 망해버리기 전에 스스로 결핍을 사서 경험하고 극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Story는 이런 결핍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창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자가 훌륭한 Story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내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멋진 Story로 승화시키는 사고를 가진 자가 리더가 되는 세상이 되어간다.
다시 말해 매우 인간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자들이 그 어떤 상황도 멋지게 변신시켜 Story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그 주변이 공감하고 그 공감대의 확산을 통해 리더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중심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초연결사회이다.
 
 
한마디로 높은 자리를 차지해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Story가 있는 자에게 역할이 주어질 것이며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관계없이 진정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자들이 리더가 되는 세상이 오고있다.
이런 각자의 Story가 의미있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세상이 아닐까.

 
자연의 모든 생물이 아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처럼
인간들의 모습도 그렇게 각자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사회 이것이 바로 초연결사회의 모습일 것이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