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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시장 칼럼] 양두구육

물러날 때 '송덕비'는 못 세울 망정 부패한 공직자 오명을 남기지 말아야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때 제나라 영공(靈公)은 자기 마음에 드는 궁중 여인에게 남자 옷을 입게 하고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자 민가의 여자들도 남자 옷을 입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민가의 여자들이 남자 옷을 입지 못하게 금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는 왕에게 수상 안영(晏瓔)이 이렇게 대답했다.

 

 

 "궁중 여인에게는 남자 옷을 입게 하시고 민가의 여자들에게는 그것을 금지히시는데 이것은 밖에 양의 머리를 걸어두고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궁중에서 먼저 남자 옷을 금지하시면 밖에서도 감히 남자 옷을 입지 못할 것입니다."그 후 제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남자 옷을 입지 않게 되었다.

 

 

입만 열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사람, 시민을 위해 일했노라고 강변하는 사람들 중에 공직을 이용해서 치부를 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 활보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돈의 힘을 이용해서 각계각층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런 사람에게 공직은 시민을 섬기는 목적 가치가 아니라 수단 가치일 뿐이다.

 

그래서 공직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 한다든가 이권을 챙기는 것을 '80년대 까지만 해도 '독직(瀆職)'이라 했고 자리를 이용한 사건이 나면 '독직사건'이라 했다. 독(瀆)자는 도랑 '독'자이나 더럽힐 '독'자로도 쓰인다.시민과 국민을 섬겨야하는 신성한 자리, 막중한 책임을 지는 사명의 자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돈 벌고 싶으면 공직을 떠나 사업이나 장사를 해야 옳을 것이다.

시민에게 막대한 재산상 손해를 끼치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사람은 드물기가 흰떡에 검은 콩 박히듯 하다. 그리고 변명하며 여론을 호도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로맨스'요 남
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조선조 말엽에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곡부 군수 조병갑의 부정과 횡포가 급기야 '동학란'이라는 민란을 자초했다. 고을 수령이 힘없는 백성을 수탈하는 수법이 날로 발달하여 뱃속에 든 태아에게도 세금을 물리고 죽은 사람에게도 인두세를 물려'가렴주구'라고 하기도 하고 세금 걷으러 오는 관리가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웠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고을 수령 잘 못 만나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산속으로 숨어들어 도적떼가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다고 한다.

 

 

시민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어도 진실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속일 수는 있어도 내 양심을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채근담에 이르기를 '하늘의 그믈은 성긴 듯 하나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서양 속담에 '늑대가 양가죽을 쓴 경우가 많다' 라고 하였다.
시민에게 재산상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서도 반성도 할 줄 모르고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나는 시민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노라 항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밖에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양두구육'의 행태와 처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부터 솔선하면서 우리시의 공직자들이 '양두구육'의 몰염치한 처세를 하지 않도록 시민이 감시하고 가족과 친지들이 공직자로서 올곧은 길을 가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물러날 때 '송덕비'는 못 세울 망정 부패한 공직자였다는 오명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날의 선비는 이(利)로움을 보면 의(義)를 생각하고 자기의 이름 석자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다.

 

 

                                            출처 용인시청 시민시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