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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시장 칼럼] 수여선`소녀`진달래 꽃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철칙에 서 벗어날 수 없다.

 칙칙 폭폭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수여선 열차...!

 

지금도 빛바랜 사진 속의 수여선 열차를 배경으로 정다운 학우들과 찍을 사진을 보노라면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

중`고등학교 6년을 타고 다녔으니 학창시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수여선(水驪線)열차!

 


수여선은 수원과 여주 사이를 운행하는 열차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수여선은 8.15 해방 이전 1920년대, 일제시대 때 부설된 철도로서 지금 철 로 보다 폭이 좁아 협궤열차라고 했다. 그리고 기관사가 석탄을 화로에 삽으로 퍼 넣으며 불을 때서 생기는 열로 인하여 생기는 증기의 힘으로 달리는 증기기관 열차였다.

 


수여선 열차는 일제의 조선 총독부에서 좋기로 이름 난 여주`이천 쌀 등 곡물과 임업 생산물을 수탈하기 위해서 놓은 철도였다.

역 근처 내가 사는 갈천 마을에는 시그널(신호등)이 있어 열차가 플랫폼 에 들어와 있으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그리고 열차가 통과한 후 엔 파란 불이 켜져 철로 위를 건너 다닐 수 있었다.

 


개구장이 시절에 또래들과 함께 철로 위에 돌멩이나 쇠못을 올려 놓고 기차가 어찌되는지 몰래 뚝 밑에 엎드려 숨어서 보고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 면 잽싸게 철길로 뛰어올라 선로 위를 살펴본다. 쇠못은 납작하게 찌그러 져 있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수여선 기차역을 처음에는 구성에 앉힐 계획을 일본인들이 했었으나 구성 에 소재하는 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림(儒林)이 들고 일어나 신갈로 역 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후일담을 유림에 관계하던 나의 조부로터 들었다;.

 

 

구성은 '용구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고 옛날에 관아 앞에는 말을 타고 지 나가지 못하게 하여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고을인데, 유림들이 주장하 기를 하마비가 있는 지역에 기차는 곧 '쇠 말'이기 때문에 관아 앞을 통과 할 수 없다는 진정을 관청에 하여 기차역은 신갈로 위치가 변경되었다 한다.

 


수여선 기차(열차)는 곡간 차량이 앞에서부터 여러 량이 연결 고리로 연결돼 있고 맨 뒷 칸 두 량정도 승객이 이용하는 객차가 있었다. 주로 학생 들은 화물칸을 이용하였다. 학생들은 통학권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객 차 좌석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화물칸은 학우들끼리 장난치기가 좋아서 화물칸을 선호했다.

 


내가 그 소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 여학생은 수원 여자 중학교 3학년이었고 원천 역에서 기차를 탔다. 키 가 늘씬하게 크고 살결이 흰 얼굴에 눈매가 서글 서글한 예쁜 소녀였다. 내 눈에는 얼굴이 마치 달덩이 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소녀는 나의 마음 을 사로잡았다.

 

 

그 녀와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열병과 같은 것이었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그 소녀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드는 사춘기였고 집안 환경이 그랬다. 나를 길러주신 조부모님은 기력이 노쇠하였고 힘이 없으셨다. 부모와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에도 할머니 외에 는 대화 할 상대가 없었다.

 


나 하나 낳고 세 살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젖도 떨어지기 전의 어린 자식을 떼어놓고 당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 버린 어머니! 집에는 숙부모가 계셨지만 나와는 살가운 진정한 대화는 없는 분들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조카로서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고도(孤 島)에 갖혀 있는 것처럼 외로웠다.

 

 


그래서 문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허허한 마음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문학을 좋아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문예반장을 맡아 보았다. 그리고 여주 세종대왕 능에서 열린 백일장에 장원도 하였다. 소설과 시를 국내외 작품을 불문하고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 무렵 박씨 성을 가진 그 소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소녀는 나에게는 태양과 같은 광명을 던져 주었다. 나는 애송하는 시를 적어서 소위 연애 편지를 보냈다. 연애 편지는 나와 동창되는 여학생을 통하거나 하급생을 시켜 보냈다. 그 당시는 남`여 학생이 길에서 마주보고 얘기만 나눠도 풍기가 문란하다고 어른들한테 혼쭐이 나던 시절이었다.

 


신갈에서 기차를 타면 약20분 정도 지나 원천역에 도착한다. 원천 역이 가까워 지면 나의 심장은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나의 눈은 풀랫폼에 서 있는 그 소녀의 모습을 찾기에 바빴다. 활짝 웃는 그 소녀가 눈빛으로 반가와 하면서 내가 타고 있는 열차칸으로 승차하면 비로소 안도가 되었다. 그런데 안 보이거나 다른 칸으로 타면 마 음이 불안하였다.

 

 

그 소녀와 첫사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 할 때까지 이어졌 다. 그녀도 나를 무척 좋아하였다. 내 생일 때는 말린 고운 단풍잎을 '마음의 샘터'라는 책갈피에 넣어 선물하기도 하였다.

 


꽃피는 봄에는 둘이서 수여선 철로를 걷기도 하고 진달래 꽃이 만발한 산 길을 거닐며 진달래 꽃을 따먹기도 하였다. 토요일에는 오전 수업만 있기 때문에 방과 후에 소녀를 만나 철길을 걸었다.

 

 

신갈 역과 원천 역 사이에 지금은 태광 골프장이 들어서 있지만 그 당시 덕굴(지금의 터널)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철길 주변에는 야산이 이어져 있 었다. 그런데 그 산에는 봄이면 진달래 꽃이 만발하여 마치 산이 붉게 불에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진달래꽃의 향기와 우리의 풋풋한 첫사랑 의 향기가 어우러져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소녀와의 첫사랑은 외로움에 방황하는 내 영혼에 크나큰 위안 이 되었고 나를 붙들어 주었다. 그 소녀를 만나거나 편지를 쓸 때 곧잘 인용하던 시가 김 소월 시인의 '진 달래 꽃', '초혼', '못잊어'와 하이네의 시편들이었다.

 

 

내가 애송하던 김 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 꽃'은 너무도 유명하여 적어 본다.


 나

▲ 진달래꽃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쁜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 소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느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하였고 나는 군대 에 입대하여 군 생활하면서 첫 휴가 올 때까지 편지가 오갔으나 얼마 후에 소식이 끊어져 알아보니 시집을 갔다고 하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다.

 

 

지금은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겼으니 할머니가 되어 있으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인연에 의해 만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알게되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만나면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철칙에 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삶에 있어 세월이 무상(無常)하고 인연이 무상 한 것이리라.

 

봄이면 생각나는 수여선과 첫사랑 소녀와 진달래 꽃에 얽힌 추억의 파편 들을 글로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