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동행(同行), 보훈 섬김이 활동을 돌아보며 경기남부보훈지청 섬김이 김문순 엄마와 딸이 쇼핑하는 모습, 엄마와 딸이 다정하게 식사하는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탓일까? 어르신들을 보면 왠지 정감이 가고 애들이 크면 어르신들께 조금 이나마 봉사라도 하고 살리라 생각하던 중에 보훈지청에 입사하여 어르신들을 만나 뵐 수 있었다. 2년 5개월 ... 꽤 많은 어르신들이 길고 짧은 인연으로 스쳐 지나갔다. 전쟁이란 막연히 무섭고 공포감 정도로만 생각한 나..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전쟁 후 고통과 아픔 역시 컸다. 내가 주기적으로 찾아뵙고 있는 김 00 어르신은 지금도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계셨다. 혈혈단신 남한으로와 가정을 이루시고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사셨다한다 . 처음 어르신 댁을 방문 했을 때 나라에 대한 원망과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랄까, 말은 부드럽게 하시면서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어르신 뵙기를 한번 두번 점점 횟수가 늘어갈수록 어르신은 마음을 조금씩 여시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의 요청으로 관리규약서에 사인을 해달라 했더니 ‘당연히 해줘야지’ 하시며 사인을 해 주셨다. 그 다음 방문 때 어르신
을지연습, 居安思危(거안사위)의 자세로 경기남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조성목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정부는 체계적인 전쟁연습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실시한 정부의 전쟁연습이 바로 ‘을지(乙支)연습’이다. 을지는 고구려 명장으로 수양제의 침략군을 물리쳤던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의 호국정신과 살수대첩에 승리한 위기대응의 호연지기를 본받아 국가위기를 다 함께 극복하자는 뜻이 담긴 명칭이기도 하다. 경기남부보훈지청에서도 오는 21일부터 3일간 관내 보훈단체 등과 함께 “ 2017년 을지 연습”을 실시할 예정이다. 올해 역시 보훈단체 등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을지연습으로 시민들의 관심과 자발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것이며, 화생방전을 대비한 대피연습과 방독면 착용 방법 교육 그리고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한 심폐소생술 연습 등 실전과 같은 전시 상황과 응급 상황 대처 훈련을 내실 있게 구성하였다. 얼마 전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며 국제 안보를 위협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등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현
경기남부보훈지청 보훈과 김다래 얼마 전 영화관에서 「박열」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22세의 젊은 나이인 그는 일본 천황제의 부당한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깨어있는 인물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내각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퍼트려 6천여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하고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러한 누명을 벗어내고자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도록 자신을 ‘대역죄인’이라 자백하며 스스로 재판에 나선다. 어렵고 암담했던 시기임에도, 부당한 권력의 희생양이, 생존을 위해 비굴하게 타협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신념을 지키고,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애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일제치하 수많은 우리 민족들의 뜨거운 ‘청춘(靑春)’을 투영해 볼 수 있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맞서 저항했던 청춘의 ‘열정(熱情)’을 느낄 수 있었다. 부끄럽게도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박열 선생님의 삶을 느끼며, 교과서와 매스컴에서 알려진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된 7월 27일 경기남부보훈지청 보훈과 양혜숙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끝나고 어느 덧 7월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에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위한 전국적인 기념행사와 학교, 언론매체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있어, 6․25전쟁 세대들은 물론 전후 세대들에게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공식이 익숙하다. 그러나 7월 27일은 어떠한가, 이날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숫자일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며 전쟁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게 된다. 그렇다. 바로 7월 27은 정전협정기념일이다. 1950년 7월 5일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부대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멀고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이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한민국’ 이 있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시금석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전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3년 1개월간의
호국원 권욱선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지나고 어느덧 7월의 하순에 접어들어 가고 있다. 우리들은 6·25전쟁의 원인과 진행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는 반면, 전쟁이 무엇을 계기로 종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지내곤 한다. 7월 27일은 3년간의 지극히 치열하고 비극적이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던 정전협정의 체결일이다. 6·25전쟁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는 데에는 우리 국군과 함께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유엔연합군이 펼친 결사적인 항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쟁이 진행된 3년여 기간 동안 총인원 195만 여명의 파병이 이루어졌고, 직접적인 파병 외에도 5개국에서 의료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 등 전세 전환의 계기가 된 전투는 물론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1951년 7월 정전협상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2년의 기간 동안 전선을 사수한 결과 결국 1953년 7월 27일 유엔연합군 총사령관, 북한군 및 중공군 사령관의 서명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유엔 총회의 승인으로 국제적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정전 협정은 완벽한 종전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비무장 지대와 군사분계선
사회봉사 담당자의 마음도 농부와 같다! 성남준법지원센터 김종만 ▲ 성남준법지원센터 김종만 지난 9일 주말 저녁 뉴스에서 반갑게도 비 소식을 듣고“드디어 가뭄이 끝나겠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폭우로 변하는 것을 보고 농가에 피해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간 가뭄 때문에 비가 오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는데 어느새 너무 많은 비로 생길 피해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월요일 아침 바삐 피해 농가를 확인한 후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사람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가 폭우로 찢어진 비닐하우스 보수, 유실된 배수로 복구작업 등을 지원하였더니 해당 농가는 “폭염 때도, 폭우 때도 이렇게 빨리 도와주니 나에게는 119와 같은 존재”라며 연신 고마워한다. 성남준법지원센터에서 5년이 넘게 농촌을 지원하는 사회봉사명령을 집행하다보니 농부는 아니되 나도 농부처럼 농번기와 농한기가 있는 듯하다. 요즘 농촌은 고령화로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곳에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하는 일도 다양하다. 3월 봄철 영농이 시작되면 재래 농가의 논밭 거름주기부터
6/25, 끝나지 않은 ‘형제의 상’ 이야기 경기남부보훈지청 보훈과 김다래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직접, 또는 매스컴을 통해서 보았을 유명한 ‘형제의 상’이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박규철, 박용철 형제를 나타내는 듯한 이 조형물은 국군장교와 인민군 병사가 갈라진 돔의 양단을 딛고 서서 포옹하고 있는 군인 조각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를 안고 있다. 이 둘은 각기 남과 북 진영에서 총을 겨누다 형과 동생이었음을 확인하고 쏟아지는 총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가 서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는다. 이들의 모습은 화해와 사랑, 용서의 정신이 응축된 평화의 분신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에게 총을 겨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싸워야 했던 전쟁의 아픔이었던 비극의 분신이기도 하다. 한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급작스런 북한의 도발이 우리 남한에 미친 상처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났다. 어린아이까지 전쟁을 경험하게 되며 미군들이 키가 너무 작아서 총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는 우리 학도의용군들에게 ‘베이비솔져’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당시 우리의 안타까운 상황의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독
[기고]6월 호국보훈의 달, 갈등극복을 넘어 소통과 통합, 공존의 전환점으로 경기남부보훈지청장 남창수 엊그제 신문 기사를 보니 현재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국민 갈등지수가 2번째로 높고, 1년에 갈등비용이 무려 250조나 된다는 연구보고가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갈등은 사회갈등요인은 많고 갈등관리 수준은 낮아 발생하게 된 문제로 분석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 시점에, 다음달이면 ‘호국보훈의 달’이 시작된다. 추모(6.1~10)-감사(6.11~20)-화합(6.21~30)의 기간으로 연결된 올해 6월 호국보훈의 달은 이념, 세대, 빈부, 지역등 사회의 많은 갈등들에 대한 국민통합정신을 실현시킬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논의를 좁혀 호국보훈의 달을 통해 어떻게 세대공존과 화합의 장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최근 이른바 수저론이라하여, 부모의 재력에 따라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자녀의 계급이 바뀐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와 희망 없는 사회를 뜻하는 헬조선 등이 대한민국을 강타하였다. 이처럼 현실이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늘며 기성세대와의 세대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독일이 분단 갈등을 넘어 강대국의 자리를
6월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며, 그 중에서도 6월 6일은 현충일로서, 그 분들의 희생과 위훈을 추모하는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현충일은 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 전쟁 이후, 전쟁에서 희생하신 분들을 위한 묘역을 조성하며, 역사의 곳곳에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함께 기리기 위한 기념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에 1956년부터 현재와 같은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제정 당시 6월 6일은 24절기상 ‘망종’으로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기도 하였기에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의미를 더욱 더했다고 할 수 있다. 1983년 이후로 현충일 추념행사를 주관하게 된 국가보훈처는 정부공식행사로서의 추념식을 서울현충원에서 거행하고 있으며, 각 국립묘지에서 자체 추념식을 거행하여 추모의 의의를 더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소속으로 2008년 개원한 국립이천호국원 또한 국립묘지로서 이번 현충일에도 자체추념식을 진행하여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고 목숨을 바친 국가유공자분들을 그 분들의 유족과 함께 기릴 예정이다. 추념식 외에도 국민 개인으로서 현충일의 의의를 기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기
인생 2막 준비하기 (주)원익홀딩스 환경안전팀 주임 김 도 영 공군에서 33년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재취업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나섰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재취업은 쉽지만은 않은 고행이었다. 전역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자주 들었지만, 복무 중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전직지원 교육 중 제대군인지원센터를 알게 되었고, 담당 상담사로부터 전문적인 직업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시설관리분야에 관심이 있어 교육훈련비를 지원받아 종합건물관리사, 전기기능사, 소방관리자 2급, 지게차 운전기능사, 사무자동화 산업기사 등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던 중 코스닥 상장기업인 (주)원익홀딩스의 시설관리분야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아웃소싱을 통한 입사였지만 좋은 조건이었다. 전역 후 10개월만인 16년 6월 1일 드디어 5대1의 경쟁을 뚫고 재취업에 성공했다. 모든 환경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군 복무를 통해 체득한 자신감을 가지고 근무한 결과 6개월 동안 ‘회사시설관리 원가절감 3천여만원’이라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용역직원으로는 처음으로 연말 성과급 지급대상이 될 수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