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딸이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문정남 장로님과 김현숙 권사 손녀 아현이를 보내면서 같이 엮어서 보내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아현이는 비자가 나오고 딸 현이는 비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부모에게 집 한 채도 없고 재산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때 딸도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집사람도 저더러 빛 좋은 개살구라며 원망이 컸습니다.
남들 보기엔 큰 교회 목사니깐 재산도 넉넉하리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집사람 명의로 아파트를 한 채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만은. 그것도 경매로 넘어갈 교인의 집을 구제 하다시피 산 것 입니다. 그때 집을 마련하도록 배려를 해주신 우리 장로님들께 다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이 대학을 편입하게 되어 은행 잔고증명을 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제 통장에는 120만원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또 집사람이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며 한탄을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이라면 그래도 비상시를 위해 몇 천 만원은 통장에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안해서 다음 주 중에 어떻게든지 2-3000만원의 잔고증명을 할 수 있도록 해놓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전혀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니죠. 다만 모으지를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게와 도와달라고 하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막무가내로 돈을 맡겨놓은 사람처럼 꿔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회 재정을 제 맘대로 좌우지하는 것도 아니고 또 교회도 절대로 넉넉지 않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속도 모르고 제 개인돈이라도 꿔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내가 소신껏 목회를 해도 교회 재정은 내 맘대로 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설득을 하면 제 개인 돈이라고 꿔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에게 와서 미국간 딸이 학비를 못 내고 홈스테이조차 안 된다고 애걸복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개인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다 긁어서 줘버리기도 했습니다. 6.25참전용사 초청행사 후 김종대 장로님이 해외선교비를 쓰라며 3000불을 가지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해외갈 일이 없어서 딸이 오면 줄려고 했는데, 그것까지 닥닥 긁어 줘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이번 추석 때 어렵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나눠주다 보니 잔고가 120만원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잔고증명을 발급받아야 되는데 그렇다고 누구한테 꿔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와 속없이 터놓고 사는 교인도 있지요. 그리고 이틀만 통장에 넣어 뒀다가 다시 빼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진짜 누구에게도 그런 얘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말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자존심이 많았습니다. 어린시절에 초등학교에서 배급해주는 강냉이가루나 우유가루를 한번도 타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 역시 잘난 자존심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담임선생님께서 가난한 사람만 우유가루를 타러오라고 해서 갔더니 선생님이 저에게 "강석아, 너희 집도 가난하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속으로 담임선생님 욕을 바글바글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저희 아버지가 씻나락이 다 떨어졌다고 걱정을 하면 기차를 타고 친구네 집까지 가서 씻나락을 얻어왔던 그런 용기가 제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는 별일도 다했습니다. 동구 밖 정자나무에 불을 붙여 불장난을 했다든지, 보리밭을 지나가다가도 보리 모가지를 훅 불어 구워먹다가 들킬 때는 내가 먼저 했다고 대신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총대를 메고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의 머리는 못 깎았단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목요일 날 헌금심방을 와달라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구 전도사님과 헌신을 하신 집사님께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미리 헌금을 하더라도 우리 교회는 주일날 재정계수를 하기 때문에 잠시 이 헌금을 내 통장에 넣어놨다가 금요일 날 찾아서 재정부에 전달하여 헌금계수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김문기 장로님과 남수현장로님께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일계수에만 지장이 없도록 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제 자존심이 상하지 않고 떳떳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요일날 입금 후 잔고증명을 한 뒤 다음날 다시 돈을 찾아 헌금계수에는 전혀 지장이 없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자체도 마음이 썩 개운치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후회스러운 마음도 들어왔습니다. '차라리 그때 남을 도와주지 않고 돈을 조금씩 이라도 모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남 좋은 일만 하고 내 일에는 소홀히 해서 이렇게 사람이 스스로 초라해지게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깟 자존심이 뭐 그릭 대단하다고 이렇게 외길만을 걸으려고 한단말인가. 또 이렇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고 얼마나 이 사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가.'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임을 어떡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 앞에 떳떳한 마음이 드는걸 어떡합니까.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삶도 더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더 자존심을 지킬 수 밖에요. 그래서 스스로 자위를 했습니다.
이렇게 내 개인통장에 돈은 없어도 자존심만큼은 듬뿍 비축해 놓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의 재산이고 보화가 될 것을 확신하고 또 확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