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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시장칼럼] 세한도

추사선생의 발문,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요즘처럼 한파가 몰아치는 혹한의 추위에 상징처럼 떠오르는 그림 한 폭! 바로 세한도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 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린 그림으로서 국보 제 180호로 지정받은 명화이다.

 


'세한도'는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소전 손 재형(1903~1981) 선생의 끈질긴 노력과 투자로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던 사연이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세로 23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으로 된 그림이다. 가로로 긴 화면에 쓰러져가는 오두막집과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고 나머지 화면은 텅 비어 있어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절로 든다.

 


'세한도'는 춥고 배고픈, 처절한 고독을 체험한 사람에게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그림이다.'08~2009'년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하루하루가 막막하던 암울하던 시기에 책에서 접했던 '세한도' 그림과 이야기는 나에게 큰 마음의 울림을 주었다.

 

 

'세한도(歲寒圖)'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 비늘처럼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의 세계가 담백하고 고담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 김 정희(1786~1856) 선생은 병조판서 김 노경의 장남으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후사가 없던 큰 아버지 김 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살게 되었고, 젊어서 청나라를 왕래하며 당대의 금석한 대가인 '옹 강방' 등과 교유하며 그들로부터 금`석`문(金石文)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혀 후일 금석문의 대가와 명필의 경지를 이루었다. 추사 선생은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 예조참의,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충남 서천) 현감으로 재임시 김 우영을 파직시킨 사건으로 당시 세도 정치 가문인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부친은 유배 후 사사되고 추사 선생은 1840년 제주도 정포에 유배되어 8년을 보내게 된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할 때인 1844년(59세)에 당시 역관(譯官)으로 있던 제자 우선(藕船) 이 상적(李 尙迪;1804~1865)에게 고마운 마음과 인품을 기리는 마음에서 그를 위해 그린 그림이다.

 

이 상적은 역관으로 있으면서 중국을 다녀 올 때 스승인 추사에게 증정할 책을 구해서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제주도로 직접 들어가 책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추사 선생은 지위와 권력을 박탈 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추사 선생에게 귀한 책을 보낸다는 것은 위험 부담을 감수하겠다는 비상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며 두 번이나 책을 보냈던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비정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켰던 것이다.

 

 

옛 속담에 '정승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서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며 문상객이 적다'라고 하여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염량세태'의 인심을 빗댄 말이 있다. 추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이 상적의 인품을 한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추사체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소나무는 책을 구해준 이 상적의 지조를 뜻하고 금번에 또 다시 책을 구해준 절개를 상징하는 듯하다.

 

 

추사 선생이 제자 이 상적에게 보낸 발문(跋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이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구한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로움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귄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성글어진다, 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 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也)'고 하였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슬프다! 완당 노인 쓰다. -스승과 제자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의리의 극치 사례이다. 요즘 세태와 너무 비교된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
다'라는 말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스승을 존경하는 풍조도 사라지는 것 같고 존경은 커녕 스승을 욕보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여 왕래가 편리하고 택배 제도가 있던 시절도 아닌 시기에 중국에 가서 책을 구입하여 오로지 배를 타고 서책을 실어 그것도 두 번씩이나 1백권이 넘는 책을 추사 선생 유배지까지 직접 전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어떤가...!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이다. 내가 곤궁한 처지, 역경에 처했을 때 참다운 친구가 가려진다. 그리고 가족 친지까지도 진면목이 나타난다.

 


조선조였던 150여년 전과 현재 한국인의 삶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파가 다른 집단끼리 극한 대립이 지금은 없는 사회인가...? 잇속을 위해서는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세상 인심이 그 때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역경에 처했을 때 나를 지켜준 아내와 가족이 있고 참다운 의리의 친구가 한 사람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행복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추울 때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송백과 같은 의리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 진다. 한파가 몰아치는 깊은 겨울 밤에 세한도를 떠올리며 소회의 글을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