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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시장칼럼] 졸업식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졸업 시즌이라 오랜 만에 모교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관내 초등학교가 일백 곳에 가까우니 다 다닐 수도 없지만 졸업식이 하루 이틀 새에 많이 열리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다 다닐 수 없다.

 

모교인 신갈초등학교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학교이다. 우선 나의 선친부터 시작하여 나와 큰 아들 명균이까지 3대가 신갈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의 조부께서 학교 부지의 일부를 희사한 인연이 있어 더욱 그렇다.

 

 

신갈초등학교는 1909년에 사립 용인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49년에 신갈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신갈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올 해가 100회 졸업식이기 때문에 학교 연혁을 쓰는 것이다.

 

 

학교 역사가 일백년 넘는 학교가 용인시에서는 양지 초등학교 다음에 신갈초등학교이다. 배출된 졸업생 숫자만 해도 1만 5천6백7십7명이다. 국가 사회에 기여한 인재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타 학교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다.

 

요즘은 초등학교 졸업은 누구나 다 하는 것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만 해도 초등학교 졸업하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이다. 내가 입학하던 해가 바로 육이오 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으로서 학교 건물(교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환경이 열악했다.

 

 

그래도 우리 선배들 보다는 나은 환경이었다. 3,4년 이상 선배들은 전란중에 학교를 다녀 교사는 커녕 피난 중에 천막 교실에서 배운 사람도 있고 제 때 학교를 못다녀 일 이년 학교를 쉬었다가 졸업하는 경우도 있는 등 들쭉 날쭉이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닌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세끼 밥 먹고 살기 어려워 학교 못 다닌 아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문맹율도 높던 시절이었다. 낫을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우스개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정 교과서 외에는 별로 볼 책도 없었고 학용품이래야 공책과 연필이 전부였다. 필통은 양철로 되어 있어 연필이 곯기 십상이었다.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과 필통을 둘둘 말아 싸서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십리 길, 이십리 길을 힘든 줄 모르고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60, 70대의 학교 다니던 시절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때라 학교 보내는 우선 순위에서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학교 가는 것이 어려울 때였다.

 

 

먼저 아들 학교 보낸 뒤에 여유가 있을 때 딸을 배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은 모두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을 진학시키려 해도 등록금을 마련할 형편이 못되는 집안에서는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설립된 '미인가 학교인 배성중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 학교에는 이북에서
월남한 교육자인 이 모씨가 교장을 맡아 중학교 교과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나마 남학생들 차지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은 농사를 짓는 집안의 가사를 돕거나 돈을 벌기 위하여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거나 한창 취업의 지름길이 되는 편물, 양재 학원을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편물점 학원은 소위 '뜨게질' 기술이었다. 그리고 '양재학원'은 여자들의 양장 옷을 재단하고 짓는 기술을 배우는 학원이었다.

 

 

얼마 후에 가발 수출의 붐이 일면서 우리 지역에도 '다X무역'이라는 가발 회사가 들어 오면서 전국 각 지역의 미혼 처녀들이 모여들었다. 중학교에 진학 못한 남자들은 농사를 돕거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발 학원에 다니기도 하였다.

 

 

그 당시 국민학교 졸업식은 학우들과 이별을 뜻하였다. 남학생들도 졸업생 중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삼분의 일도 못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졸업을 하면 언제 다시 만난다는 기약이 없었다. 더구나 여학생은 진학율이 형편 없었기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만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졸업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6년 동안 정들었던 교실과 교정과 선생님과 학우들과의 정은 요즘과는 달랐다. 요즘처럼 방과 후 교습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로 학교 정규 과정으로 학업을 채우면서 방과 후에도 학우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던 때였다. 요즘처럼 인터넷 게임이니, 애니메이션이니, 영화니 하는 영상 매체가 없던 때라 학우들과 함께 놀지 않으면 달리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남자 아이들은 소위 일본말로 '댕구 치기'라고 해서 유리로
된 구슬치기를 하는데 땅에 구멍을 파고 집어 넣거나 상대방의 구슬을 맞추는 사람이 따먹는 놀이와 종이로 딱지를 접어 상대방과 딱지 치기를 하여 따먹는 것이 주된 오락이었다. 여학생들은 고무줄을 양쪽에서 붙 잡고 노래 가락에 맞춰 고무줄을 돌리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발에 고무줄이 걸리지 않도록 껑충 껑충 뛰면서 많은 횟수로 뛴 사람이 이기는 소위 '고무줄 넘기' 놀이가 유일한 오락이었다.

 

 

겨울을 앞 둔 늦 가을에는 전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교실 난로에 넣고 땔 '솔방울'을 산에 가서 줍도록 학교에서는 독려하였다. 담임 선생님 책임하에 솔 방울을 많이 줍는 반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런 관행은 일제의 잔재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미국이나 유엔의 원조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소위 GNP 60불 시대 얘기이기 때문이다. 학동들이 먹을 것이 없어 그 당시 일본말로 도시락을 '벤또'라고 하던 시절에 도시락을 못 싸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이다. 졸업 무렵에는 유엔의 원조로 들어온 분유(가루 우유)가 점심 때 배급되었다. 그것도 점심 도시락 못싸온 학우들 몫이었다. 커다란 알미늄 물 주전자에 물을 끓여 가루 우유를 뜨거운 물에 한 컵 씩 타서 주면 그것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집이 가까운 까닭에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어
점심을 거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도시락을 못 싸오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것은 후덕하신 할머니 덕분이었다. 동네에는 밥 굶을 정도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할머니께서 먹을 양식을 보내주곤 하였다.

 

 


일본의 교육 정책으로부터 명명된 학교 이름이 '황국신민'의 준말로서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붙여 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졸업식은 바로 '이별'을 뜻하였다. 요즘의 졸업식은 밝고 희망찬 이유가 있다. 바로 같은 중학교에서 만나거나 설혹 다른 중학교에 가서라도 진학하여 동등한 위치 때문에 서러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는 졸업식이 영영 이별로 끝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진학 못하는 학생들과 진학하는 학생들 모두에게 슬플 수 밖에 없는 졸업식이 되었다. 그래서 졸업식은 학생이나 선생님 모두에게 석별의 정을 나누다 보니 울음바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얼마전 뜻 깊은 졸업식에 다녀왔다. '성인문해교육 졸업식'이다. 연세 많은 분들이 젊어서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교를 못다녀 한글도 못 깨친 분들이 다니는 과정이다. 나이가 5,6,7십대 등 다양하다. 그 분들이 만학의 꿈을 품고 배움에 도전하여 한글과 영어, 컴퓨터 등을 배워 자기의 꿈을 펼치는 모습은 그대로 '인간승리'의 장엄한 표현이었다.

 

 

그 분들은 모두 감격에 울먹이었다. 못 배운 것은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시대를 잘 못 타고 난 것이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굶주리던 시기에 전쟁을 만나 피난 다니기 바빴고 언제 교육을 편하게 받을 수 있었겠나...!? 나라의 주권이 외세에 강탈 당하고 해방 되자 마자 육이오 전쟁을 치르면서 핍박을 당한 민족에게 교육의 기회가 골고루 주어진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고 더우기 여자들에게는 '언감생심'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순위가 아들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업식은 여학생들에게는 이별과 다름 없었다. 졸업하면 평생 못 볼 수 있는 '이별의 장'이었다. 그래서 졸업식장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나에게는 남다른 서글픔이 있는 졸업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의식에 눈 뜰 시기가 바로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졸업식 때 다른 학우들은 아빠와 엄마가 와서 축하해 주었으나 나는 할머니가 오시거나 삼촌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소풍을 갈 때, 학교 가을 운동회, 학예회 때 나에게는 항상 어머니와 아버지가 곁에 없었다. 그리고 손 잡고 뛰어 줄 아빠 엄마가 없는 것이 나의 가슴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들게 하였
다. 그래서 학교 운동회나 학예회나 학부모들이 참석하는 행사가 나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등 모든 졸업식은 나에게 씁쓸하고 서글픈 추억만을 안겨 주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들은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언제나 들어도 가슴 가슴 설레며 동심에 젖게 하는 졸업식 노래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